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실험적 소설로, 1930년 발표 당시부터 문학적 혁신성과 독창성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다중 화자,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모더니즘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인간 내면과 언어, 죽음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심도 있게 탐구한다. 포크너는 미국 문학에서 전통적 서사구조를 해체하고, 내면세계의 복잡성과 인간 존재의 파편화를 전면에 내세운 작가이며, 이 작품은 그 정점에 위치한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죽음을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시선과 감정, 욕망을 토로하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각 인물의 실존적 고민과 인간 조건을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본 리뷰에서는 이 작품의 형식적 실험, 죽음의 의미, 가족과 개인의 균열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모더니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15명의 화자가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 감정, 판단에 따라 이야기를 조각내어 제시하며, 독자는 그 조각들을 통해 전체 사건을 추론해야 한다. 포크너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내면 독백, 의식의 흐름을 통해 이야기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구성한다. 이 방식은 독자에게 큰 해석의 부담을 주지만, 동시에 언어와 사고가 얼마나 주관적이고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앤스 번든, 캐시, 듀이 델, 벌던, 대럴 등 주요 인물들의 서술은 언어적 일관성이 없으며, 문장 구조조차 파괴된 경우가 많다. 이는 그들의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와 미처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내면의 갈등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장치다. 대럴의 경우, 광기에 가까운 인식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다. 캐시의 서술은 침묵과 상처로 가득 차 있으며, 듀이 델은 여성으로서의 억눌린 욕망과 공포를 단편적인 언어로 드러낸다. 이러한 다중 서사 구조는 진실이라는 것이 하나의 시점으로는 포착될 수 없으며, 인간 존재는 언제나 파편적이라는 포크너의 문학적 세계관을 구현한다. 또한 이러한 서술 방식은 독자가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 재구성자가 되도록 만든다. 이는 모더니즘 문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그 대표적 실현 사례다.
죽음
작품은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죽음 자체보다는 그 죽음을 둘러싼 인물들의 반응, 감정, 이해관계가 중심에 놓인다. 에디 번든의 죽음은 단순한 슬픔의 대상이 아니다. 남편 앤스는 아내의 유언을 지키겠다는 명목 아래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아이들은 각자의 욕망과 상처에 사로잡혀 있다. 죽음은 이 가족을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혼란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는 죽음이 삶의 마무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계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포크너는 죽음을 존재론적 사건으로 다루면서도, 종교적 구원이나 감정적 화해 같은 전통적인 문학적 위로를 배제한다. 에디는 살아있는 동안 가족에게서 고립되었고,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내면은 단 한 장의 독백으로 표현되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소외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목격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아무도 듣지 못하고, 가족은 여전히 각자의 입장에서만 그녀를 기억한다. 포크너는 이를 통해 죽음이 어떤 단일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이란 존재가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와 고립, 이해불가능성의 극단으로 작용한다. 이는 포크너가 말하고자 했던 인간 실존의 핵심이며, 이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문학적 깊이를 인정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족과 개인
이 작품에서 번든 가족은 표면적으로는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고립과 단절의 공간이다. 아버지 앤스는 가장이지만 책임감도, 공감 능력도 결여되어 있으며, 오히려 자신의 치아 치료를 위해 아내의 장례 여정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장남 캐시는 무겁고 우울한 존재로,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조차 누구와도 진정한 대화를 하지 못한다. 딸 듀이 델은 원치 않는 임신 상태로 혼란에 빠져 있으며, 가족은 그녀의 고통에 무관심하다. 대럴은 내면의 광기에 시달리며,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막내 벌던은 어머니의 시신을 옮기는 여정에서 끝없는 혼란과 상처를 겪는다. 이러한 인물 구성은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반드시 이해와 연대를 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고통의 기원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존재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반응한다. 포크너는 가족이라는 제도를 이상화하지 않으며,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상처투성이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말로 표현되지 않는 침묵, 내면에 머무는 고통, 서로의 감정을 회피하는 태도는 가족 내부의 고립을 극대화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가족을 통해 인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고립된 실존을 조명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 주제는, 독자에게 가족이라는 관계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포크너는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비극적 측면을 극대화하며, 문학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게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윌리엄 포크너의 문학 세계가 집약된 걸작이며,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이 도달한 서사적·언어적 실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해석의 불편함을 주지만, 그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언어의 한계, 감정의 다층성을 경험하게 한다. 포크너는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하고, 침묵을 통해 언어를 드러내며, 고립을 통해 가족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목소리 속에 숨겨진 감정의 잔향을 포착하고,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적 여정이다. 오늘날에도 이 작품은 여전히 유효하며, 인간과 언어, 공동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문학을 통해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비추었고, 나는 죽어 누워 있을 때는 그 빛이 가장 강렬하게 발현된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