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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평안은 없다의 식민 유산, 도덕의 붕괴, 정체성의 균열

by anmoklove 2026. 1. 2.

치누아 아체베의 『더 이상 평안은 없다(No Longer at Ease)』는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졌다』의 주인공 오콩코의 손자 오비 오코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작소설이자, 독립 전 나이지리아의 젊은 지식인이 겪는 정체성의 균열과 도덕적 붕괴를 통해 식민주의의 실질적 유산을 해부한 포스트콜로니얼 문학의 걸작이다. 아체베는 전작에서 서구 문명의 유입으로 전통 이그보 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을 다뤘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서구 교육을 받고 돌아온 식민지 엘리트가 어떻게 부패 구조에 타협하고 무너지는지를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 오비가 결국 뇌물 수수로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되며, 이후 그의 몰락 과정을 회고적으로 풀어낸다. 아체베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뒤집어, 독자에게 오비가 실패할 운명임을 먼저 제시한 후, 그 원인과 과정을 조밀하게 분석해나간다. 이 방식은 단지 문학적 기교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 판단보다 구조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둔다. 오비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유학파로, 아프리카 전통과 서구 근대성 사이에서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다. 그는 양쪽 모두에 속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결국 정체성의 공백 속에서 도덕적 기준을 잃고 파멸로 향한다. 본 리뷰에서는 『더 이상 평안은 없다』를 세 가지 측면—식민주의 유산과 근대 엘리트의 딜레마, 도덕의 붕괴와 부패의 일상화,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과 주체성의 위기—로 나누어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의 식민 유산

오비 오코눠는 나이지리아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유망한 젊은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마련해준 장학금으로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후 식민 행정부에 취직하여 안정된 커리어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사회는 그가 기대했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영국에서 배운 서구적 가치와 이상주의는 부패와 타협이 일상화된 식민지 말기의 현실에선 무력하기만 하다. 아체베는 오비를 통해 근대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이상주의와 현실 사이에서 어떤 갈등을 겪는지를 보여준다. 오비는 처음에는 뇌물 수수를 거부하고, 공정한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는 곧 가족과 공동체의 기대, 경제적 부담, 문화적 충돌 속에서 그 원칙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그의 어머니는 전통적 가치와 가족의 명예를 지키려 하고, 그의 약혼자는 기독교 가치관과 이그보 전통 사이에서 거부당한다. 이러한 개인적 갈등은 단지 가족 문제를 넘어, 근대성과 전통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오비는 서구 교육을 받았지만, 그가 속한 세계는 여전히 전통적 가치와 식민적 질서가 얽힌 복합 구조 안에 있다. 아체베는 그가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는 경계적 인물임을 강조한다. 그는 마치 두 세계 사이에서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뿌리도 정체성도 확립하지 못한 채 점점 고립되어 간다. 이처럼 아체베는 단순히 개인의 타락이 아닌, 식민주의가 만든 제도적 공백 속에서 탄생한 ‘근대 식민 엘리트’의 구조적 딜레마를 심층적으로 파헤친다.

도덕의 붕괴

『더 이상 평안은 없다』의 핵심 서사는 도덕의 붕괴, 혹은 윤리적 기준이 사회 전체에서 어떻게 기능을 상실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오비는 뇌물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초기에 몇 차례 부정 청탁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경제적 압박, 직장 내 정치, 가족의 요구에 시달리며 점차 타협하게 된다. 그는 본래 이상주의자였지만, 현실에서 이상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여기서 아체베는 부패를 단지 몇몇 개인의 일탈로 그리지 않고, 구조화된 일상으로 묘사한다. 모든 공무원이 암묵적으로 뇌물을 주고받으며, 시민들도 이를 당연한 절차로 인식하고 있다. 오비조차 결국 그 시스템의 일원이 되어간다. 중요한 것은 그의 몰락이 폭력적 반전이나 악의적 선택이 아닌, 점진적 타협의 반복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아체베는 이를 통해 독자가 오비에게 단순히 분노하거나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그 몰락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작가는 식민지 말기 나이지리아 사회에서 도덕이 더 이상 효력을 가지지 못하고, 제도가 시민의 윤리보다 더 강한 압력으로 작동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특히 교회, 가족, 국가 등 전통적으로 도덕을 지탱하던 기구들이 더 이상 기준을 제시하지 못할 때, 개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가? 오비의 몰락은 사회 전체의 윤리적 붕괴의 한 단면이며, 그의 체포는 단죄가 아니라 그가 감당할 수 없던 시대의 무게를 상징한다.

정체성의 균열

오비는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려 하지만, 그가 딛고 있는 땅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그는 나이지리아인이지만, 영국에서 교육을 받으며 서구적 가치에 익숙해졌고, 돌아온 후에는 전통 사회와 서구 행정 사이의 이중적 질서 안에서 고립된다. 특히 사랑하는 여성 클라라와의 관계는 이 정체성 위기를 더욱 심화시킨다. 클라라는 오비의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오스’ 계급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며, 전통적 결혼 제도는 두 사람의 사랑을 부정한다. 이때 오비는 가족의 전통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양쪽 모두를 잃는다. 그는 스스로를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으로 여겼지만, 전통의 실질적 영향력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이 정체성의 혼란은 그의 언어, 의상, 사고방식, 인간관계 전반에서 드러난다. 그는 영어로 사고하고, 서구식 논리를 따르려 하지만, 그 주변은 여전히 이그보 전통과 식민지적 유산이 얽힌 혼성 공간이다. 아체베는 이러한 ‘문화적 하이브리드’ 상태가 결코 유연성이나 포용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주체성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오비는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낀 세대’의 초상이다. 그는 과거와 미래, 전통과 근대, 가족과 개인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어느 것도 온전히 선택하거나 포기하지 못한다. 결국 이 애매한 정체성은 결정의 유예, 윤리의 중단, 그리고 타협으로 이어지고, 그는 주체로서의 힘을 상실한 채 시대에 휘둘리는 존재가 된다. 이처럼 아체베는 오비라는 인물을 통해 식민주의 이후 세계에서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더 이상 평안은 없다』는 단지 한 인물의 몰락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식민주의가 남긴 정치적·사회적·심리적 유산을 세밀하게 해부하며, 그 유산이 근대화된 듯 보이는 젊은 엘리트조차도 어떻게 옥죄고 무너뜨리는지를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오비 오코눠의 몰락은 개인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모순되고 이중적인 구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지를 드러내는 구조적 비극이다. 치누아 아체베는 이 작품을 통해 도덕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회, 정체성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는 제목처럼, 현대 아프리카의 엘리트와 민중 모두가 겪는 불안과 균열, 윤리의 공백을 통찰하는 포스트콜로니얼 문학의 고전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 걸작이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