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La invención de Morel)』은 철학적 사유와 공학적 상상력이 결합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걸작이자 SF와 환상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발표 당시(1940년)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소재였던 ‘복제된 존재’, ‘가상 공간’, ‘기억의 기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사랑과 고독, 존재론적 위기까지 폭넓게 사유하며 전개되는 이 작품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서사적·개념적 밀도를 자랑한다. 보르헤스는 이 작품에 서문을 쓰며 “플롯의 완벽함을 처음 경험했다”라고 평가했으며, 이후 많은 문학가들과 철학자들이 『모렐의 발명』을 현대 문학의 이정표로 인정했다. 이 소설은 범죄자로 쫓기는 익명의 ‘화자’가 외딴 섬에 숨어들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그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간을 체험하고, 기묘한 인물들과 그들의 반복적인 행태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모렐’이라는 과학자가 만든 복제 장치로 만들어진 가상 현실임을 알게 된다. 그는 실존하지 않는 여인 파우스티나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함께 존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 기계에 자신을 복제하기로 결정한다. 이 극단적 선택은 사랑의 형식, 존재의 본질,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되묻게 하며, 단순한 환상문학 이상의 깊이를 제공한다. 본 리뷰에서는 이 작품의 주제를 세 가지 핵심 축으로 분석한다. 첫째,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이야기 구조와 독자 경험. 둘째, 존재와 복제라는 철학적·과학적 개념이 인간 정체성과 자아 인식에 끼치는 영향. 셋째, 고독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기술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되며, 윤리적 결단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해 고찰한다. 『모렐의 발명』은 20세기 중반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얼마나 실험적이고 선구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자, 문학적 예언이라 할 수 있다.
모렐의 발명의 환상과 현실
『모렐의 발명』은 이야기의 첫 문장부터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화자는 자신의 이름도 배경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탈주범’으로서 외딴 섬에 도착했다는 사실만 제시한다. 독자는 그와 함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서서히 섬을 탐험하며, 의문의 건축물과 등장인물, 그리고 반복되는 장면들을 관찰하게 된다. 이때 카사레스는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공간적 장치를 매우 치밀하게 설계한다. 섬은 외견상 버려진 공간이지만, 밤마다 음악과 대화가 들려오고, 특정한 인물들이 정해진 행동을 반복하며 등장한다. 주인공은 처음에 그들이 유령이라 생각하지만, 점차 그것이 영상도, 실체도 아닌 기묘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것이 ‘모렐’이라는 과학자의 발명품—인간의 존재를 3차원 영상과 감각 정보로 완전히 복제하는 기계—로 인해 생성된 가상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독자는 두 겹의 시간과 공간, 즉 현실의 섬과 기계가 만들어낸 과거의 재생 공간 속을 동시에 인식하게 되며, 서사는 일직선이 아닌 순환적·반복적 구조를 띤다. 이와 같은 이야기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끊임없이 품게 한다. 현실의 기준은 감각인가, 지속성인가, 상호작용인가? 『모렐의 발명』은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우리가 믿는 현실이 결국은 반복되는 기억의 덩어리에 불과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구조는 현대 메타픽션, 가상현실 서사, 시뮬라크르 개념에 선취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보르헤스, 카프카, 필립 K. 딕, 디지털 시대의 무수한 작가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존재와 복제
『모렐의 발명』이 SF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복제 기술’이 단순한 과학적 상상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모렐이 만든 기계는 인간의 모든 감각적 경험과 생리적 상태, 움직임, 목소리 등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재현할 수 있는 장치이다. 이 기계를 통해 과거의 일주일치 ‘삶’이 영원히 반복되며, 복제된 인물들은 자신이 복제된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기계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독자는 한 가지 심대한 질문과 마주한다. "복제된 존재는 존재하는가?" 주인공은 이 질문을 실존적으로 겪게 된다. 그는 파우스티나라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복제된 이미지일 뿐이며, 그 어떤 상호작용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 환영에 빠져들고, 결국 자신 역시 기계에 기록되어 그녀 곁에 머무르기를 결심한다. 이 결정은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를 전복시키는 행위다. 존재는 더 이상 물리적 실체에만 기반하지 않으며, 감정과 기억,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도 정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복제는 단지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극단적 윤리이자 구원의 방식이 된다. 또한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일 수도 있다. 카사레스는 이를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진짜 나', '진짜 사랑', '진짜 현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기술과 상상력에 의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존재의 유일성, 기억의 윤리성, 영원성의 덧없음을 문학적으로 해체하며, 철학과 문학, 과학을 아우르는 서사의 경지를 개척한다.
고독과 사랑
『모렐의 발명』은 표면적으로는 공상 과학적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고독한 한 인간의 사랑이 놓여 있다. 주인공이 복제된 파우스티나에게 빠지는 감정은 단지 욕망이 아니라, 존재의 고립에서 오는 절박한 소통의 시도이다. 파우스티나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으며, 반응하지 않고, 심지어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무반응 속에서 주인공은 오히려 더 깊은 감정에 빠져든다. 이는 전통적 의미의 사랑—상호작용, 공감, 공유—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고립된 감정의 순수한 형태이다. 그는 파우스티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줄 수 없지만,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기계에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로 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사랑의 윤리적 차원까지도 포함한다. 그는 그녀와의 실질적인 관계를 포기하면서도, 그녀 곁에서 영원히 머무르는 존재가 되기로 한다. 이 선택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상호적이지 않은 사랑도 진짜 사랑일 수 있는가?’ 또한 『모렐의 발명』은 고독이라는 조건을 긍정적인 사유의 토대이자 감정의 원형으로 제시한다. 주인공은 철저히 고립된 공간에서 스스로를 해체하고, 감정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며, 사랑이라는 비인격적 대상을 통해 자아를 재구성한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서 실체를 잃는 대신, 기억 속의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택한다. 이 선택은 도피이자 자기 구원이기도 하며, 감정의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서사로 작용한다. 『모렐의 발명』은 과학과 철학, 존재와 기술을 뛰어넘어, 인간 감정의 윤리와 미학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테마가 얼마나 낯설고 파괴적이며, 때론 구조적 고독 안에서만 진실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은 단순한 SF나 환상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존재론과 인식론, 감정과 윤리, 기술과 문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완성된 독보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 자체의 구조적 미학과 철학적 사유, 감정의 섬세한 묘사가 어우러진 걸작으로, 오늘날 메타버스, AI, 복제 인간 등의 개념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예언적 문학이다. 주인공이 현실을 포기하고 복제된 세계 속에서 영원을 택하는 서사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21세기 독자들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 『모렐의 발명』은 ‘나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학만이 줄 수 있는 방식으로 답변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철학보다 강력하고, 과학보다 섬세하며, 감정보다 더 깊은 상상력의 힘을 보여주는, 진정한 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