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한국 영화사의 이정표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악의 본질,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둠, 그리고 영화 예술의 가능성을 동시에 탐구한 이 영화는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분석을 바탕으로, 작품이 제시하는 악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탁월한 영화적 장치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악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과 그 좌절
<살인의 추억>의 핵심은 두 형사, 박두만과 서태윤이 악을 대하는 상반된 태도입니다. 박두만 형사는 "딱 보면 티가 난다"는 직관을 신봉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게 악을 발견하는 열쇠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통찰력입니다. 반면 서태윤은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며 외부의 증거를 중시합니다. 영화는 이 두 접근법을 각각의 신체 부위로 상징화합니다. 박두만에게는 '눈'이, 서태윤에게는 '손'이 중요한 수사 도구로 반복 등장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두 방법론 모두의 무력함을 냉정하게 드러냅니다. 클라이맥스에서 박두만은 박현규의 얼굴을 붙잡고 응시하지만 "모르겠다"고 토로합니다. 서태윤은 믿었던 DNA 결과 서류에 배신당하고, 그 서류는 자신의 피로 얼룩집니다. 두 형사가 공유했던 "악은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은 산산조각 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영화 초반 고반장이 던진 질문입니다. 똑같이 얼굴에 상처가 있는 두 남자 중 누가 강간범이고 누가 피해자의 오빠인지 맞춰보라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 끝까지,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서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이는 단순한 서스펜스 기법이 아닙니다. 봉준호 감독은 의도적으로 엔딩 크레딧에 "강간범"과 "피해자 오빠"를 두 배우 모두에게 표기함으로써, 악과 선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영화의 주제를 끝까지 관철합니다. 더 나아가 서태윤 자신이 영화 내내 박두만에게 두 차례 강간범으로 오인받고, 야산에서 함정 수사를 하며 범인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는 설정은 이 구분 불가능성을 심화시킵니다. 소연과의 남매 같은 관계는 그를 "강간 피해자의 오빠" 위치에도 놓습니다. 결국 영화의 두 주인공조차 강간범과 피해자 오빠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존재하게 됩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구조적 악
<살인의 추억>이 진정으로 탁월한 이유는 개인적 악을 넘어 시대의 구조적 악을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희생자 소연이 살해당하는 밤, 국가는 등화관제 훈련을 실시합니다. 북한의 위협이라는 외부의 악을 막기 위해 내부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군부독재 시대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습니다. 문명이 어둠과 싸우며 조명을 밝혀온 역사와 달리, 당시 정권은 외부의 공포를 강조하며 의도적으로 모든 불을 끄게 만들었습니다.
소연의 등에 생긴 상처는 학교에서 민방위 훈련 중 부러진 나뭇가지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 나뭇가지 부러지는 장면을 한 번 더 배치합니다. 조영구 형사가 무덤가 잠복 중 실수로 나뭇가지를 밟아 범인을 놓치는 장면입니다. 논리적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영화적 맥락에서 이 두 장면은 연결됩니다. 조영구는 항상 군화발로 등장하며, 그 발로 용의자를 차고 고문하고 시위 중인 여대생을 짓밟습니다. 그의 발은 결국 술집 싸움에서 송곳에 찔려 절단되는 처벌을 받습니다. 이는 폭력적 공권력에 대한 상징적 심판입니다.
영화 속 공권력의 무능과 폭력은 백광호를 범인으로 조작하는 과정, 현장 증거를 난잡하게 훼손하는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연을 구하지 못한 등화관제의 어둠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의 악을 막아야 할 국가가 오히려 악을 증폭시키는 더 큰 어둠으로 작동했다는 것, 이것이 <살인의 추억>이 던지는 시대에 대한 진단입니다. 세계적으로 호평받는 이유도 이 보편적 주제, 즉 권력의 무능과 폭력이 개인의 비극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정교하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영화적 완결성
봉준호 감독의 연출력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대칭 구조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영화는 메뚜기를 잡는 소년으로 시작합니다. 메뚜기는 범인의 은유입니다. 시신이 발견된 농수로를 들여다보는 박두만을 담은 첫 쇼트는 의미심장합니다. 망원렌즈로 시신 위의 메뚜기에 초점을 맞춘 뒤, 이동 포커스를 통해 멀리 있는 박두만에게 초점을 옮깁니다. 이는 형사가 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악이 형사를 먼저 들여다보는 구도입니다. 그리고 소년은 농수로 위에 앉아 박두만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범인의 얼굴을 찾으려던 박두만이 처음 마주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16년 후 마지막 장면에서 박두만은 같은 농수로를 찾습니다. 텅 빈 터널 같은 농수로를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은 클라이맥스의 기차 터널과 겹칩니다. 범인 박현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 터널처럼, 농수로는 여전히 비어있습니다. 달리아웃으로 서서히 물러나며 박두만을 담은 쇼트, 그리고 그의 시점으로 터널 속을 들어가는 달리인 쇼트는 잡을 수 없는 악에 대한 간절함과 무력함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소녀가 등장해 "며칠 전에도 누군가 같은 행동을 했다"고 말할 때, 박두만은 범인이 자신보다 며칠 먼저 이곳을 찾았다는 아이러니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평범하게 생겼어요"라는 소녀의 증언은 결정타입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익명성을 의미하고, 누구라도 범인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녀 입장에서 며칠 간격으로 같은 장소를 찾은 두 중년 남성, 즉 범인과 형사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영화 초반 고반장의 질문이 마지막에 다시 울립니다. 강간범과 피해자의 오빠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박두만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이례적으로 렌즈를 보는 이 쇼트에서, 그가 쳐다보는 것은 관객입니다. 범인이었던 박현규의 자리에 이제 관객이 앉게 됩니다. 누구라도 악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관객을 향해 직접 발사되는 순간입니다.
<살인의 추억>은 악에 대한 패배의 연대기입니다. 두 형사의 패배, 공권력의 패배, 인식 가능성의 패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영화 예술조차 악 앞에서 무력함을 인정하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패배의 고백이야말로 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듭니다. "괴물", "기생충"과 더불어 봉준호의 필모그래피 최고작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단순히 범인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악의 본질과 시대의 어둠,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정직하게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봉준호의 최고작으로 <기생충>이 아닌 <살인의 추억>을 꼽는 것은,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들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이 영화 그렇게 보는거 아니야! 진범보다 중요한 ○○!! [살인의 추억 심층 리뷰] / B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https://youtu.be/fQszNXOuX1M?si=D60JZrfEYvsg0E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