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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게걸음으로 속 역사의 불균형, 왜곡된 미래, 복합적 진실

by anmoklove 2025. 11. 10.

소설 게걸음으로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의 후기 대표작인 게걸음으로(Im Krebsgang, 2002)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발생한 실제 사건인 “빌헬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 호 침몰”이라는 비극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억, 세대 간의 단절, 전쟁과 집단 트라우마, 나아가 극우 이데올로기의 부활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직시하는 소설이다. 귄터 그라스는 이 작품을 통해 전후 독일 문학이 오랫동안 외면하거나 침묵했던 ‘독일인의 피해’라는 역사적 서사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게걸음으로는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닌, 과거로부터 현재로 되돌아오는 집단기억의 경로를 보여주며, 역사와 문학, 윤리의 교차점을 치밀하게 짚는다.

본문에서는 역사의 불균형, 왜곡된 미래, 복합적 진실을 통해 소설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소설 게걸음으로 속 역사의 불균형

게걸음으로의 중심 사건은 1945년 1월 30일, 독일 피난민을 태우고 발트해를 항해하던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 호가 소련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실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약 9,000여 명이 사망한, 단일 해상 사고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로 기록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독일 내부에서도 이 사건은 조명되지 않았고, 오히려 나치의 전쟁 책임을 덮을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침묵 속에 묻혔다. 귄터 그라스는 이 지워진 기억을 소설의 전면에 끌어내면서, 문학이 역사의 불균형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파울 포크(Paul Pokriefke)라는 저널리스트로, 그는 바로 이 침몰 사건이 벌어진 날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배 위에서 출산한 후 생존했고, 아기였던 파울 역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와 가족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겪은 비극을 극도로 민족주의적, 피해자 중심적 내러티브로 고착시키며, 아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다.

그라스는 이 소설에서 현실과 허구, 문서와 회고, 개인사와 집단사를 교차시키며,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한다. 작가는 역사학자처럼 자료를 나열하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경험과 상처, 침묵과 분노를 통해 전쟁의 본질과 집단 기억의 양면성을 직조한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 사건은 독일 민간인의 피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계기지만, 동시에 그 기억이 어떻게 왜곡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메타 서사로 기능한다. 결국 귄터 그라스는 이 소설을 통해 과거의 부정이 어떻게 현재의 위기로 이어지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말하지 않은 과거 왜곡된 미래

게걸음으로는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 회고적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기억이 어떻게 계승되는가”에 있다. 파울 포크는 자신이 살아남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거리를 두려 하지만, 그의 아들 콘라트(콘니, Konny)는 인터넷과 신나치 포럼을 통해 이 사건을 접하고, 그 기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복’하고자 한다. 이 과정은 단절된 세대 간 기억의 재생산이 어떻게 왜곡되며, 역사적 서사의 정치성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파울은 68세대에 속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나치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고 역사적 책임을 자각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어머니가 강조하는 ‘독일인의 피해’라는 서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집단 피해 의식이 또 다른 민족주의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콘니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인터넷에서 접한 ‘구스틀로프’ 사건을 독일 민족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이를 자신의 정체성 정립의 근거로 삼는다. 결국 콘니는 네오나치 성향의 인물 ‘볼프강 슈툴렌베르크’와 교류하게 되고, 역사에 대한 열망은 증오의 정치로 전이된다.

세대 간의 기억 계승에서 발생하는 이 충돌은 단순한 가족 내 갈등을 넘어, 현대 독일 사회가 직면한 극우주의 부활의 본질을 상징한다. 귄터 그라스는 “말하지 않은 과거”가 자칫 “왜곡된 미래”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며, 기억의 윤리와 교육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한다. 콘니가 인터넷을 통해 접한 왜곡된 정보는 그에게 일종의 ‘역사적 진실’로 내면화되며, 그 결과는 파괴적인 행위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집단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화되고, 극단화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게걸음으로는 역사란 단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결정짓는 현재적 행위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세대 간 기억의 계승은 단순한 전달이 아닌, 지속적인 성찰과 비판을 동반해야 하며, 문학은 이러한 대화를 가능케 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임을 귄터 그라스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복합적 진실 기억의 정치학

작품 제목인 게걸음으로는 시간적 후퇴나 회피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귄터 그라스는 과거로 ‘직선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곁눈질하며, 비틀리고, 때로는 되돌아가며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문학적 태도를 표현하고자 했다. 게가 앞으로 가지 못하고 옆으로 걷듯, 진실은 직면하기 어렵고 복잡한 경로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그라스는 오랜 시간 동안 독일 문학계와 정치계에서 “가해자로서의 독일”에 집중해 왔고, 이와 같은 태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의 반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게걸음으로에서 그는 이 균형의 반대편에 있는 ‘피해자의 서사’에도 눈을 돌린다. 단, 그는 결코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서사가 왜 억압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부활할 수 있는지, 그 정치적 위험성에 주목한다. 그는 문학이 역사의 회색 지대를 조명할 수 있어야 하며, 피상적인 도덕이나 정치적 교조주의를 넘어, 복합적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게걸음으로는 문학이 과거를 기록하는 방식에 대한 자문이기도 하다. 그라스는 소설 속에서 사실과 픽션을 뒤섞고, 여러 인물의 관점을 교차시키며, 독자로 하여금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문학은 기록이지만 동시에 해석이며, 그 해석은 항상 현재의 위치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그는 시종일관 환기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게걸음으로는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닌, ‘기억의 정치학’을 탐구하는 메타픽션이다.

오늘날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 독일 문학이 어떻게 역사와 윤리, 세대와 기억, 정치와 문학을 통합적으로 사유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귄터 그라스는 게걸음으로를 통해, 침묵이 반드시 중립은 아니며, 말하지 않음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문학적 진실을 말한다. 나아가 그는 ‘기억은 현재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과거를 이야기할 것인지에 대한 문학적, 윤리적 책임을 독자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