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소설 눈먼 암살자(The Blind Assassin)는 2000년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그녀의 가장 복합적이면서도 문학적 성취가 뛰어난 장편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단일한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 세 겹 이상의 서사가 교차하며 전개되는 다층적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가족사, 정치, 젠더, 계급, 역사, 환상문학 등 다양한 주제를 교차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애트우드는 여성의 목소리와 침묵, 기억과 서사의 불완전성, 사랑과 배신, 권력과 희생을 정교하게 엮어내며 독자에게 문학적 몰입감과 사유를 동시에 제공한다. 본문에서는 눈먼 암살자의 복합 서사, 전통적인 여성 역할, 권력 구조를 중심으로 이 작품을 분석한다.
소설 눈먼 암살자 속 복합 서사
눈먼 암살자는 한 편의 장편소설이자, 동시에 ‘소설 속의 소설’, ‘기사 속의 기사’, ‘기억 속의 진실’을 교차시키는 복합 서사이다. 작품은 80대 노년의 여성 아이리스 체이스(Iris Chase)가 과거를 회고하는 회상체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녀의 시점에서 체이스 가문의 몰락, 여동생 로라 체이스(Laura Chase)의 자살, 남편 리처드 그리핀과의 불행한 결혼생활 등이 천천히 드러난다. 이 외에도 로라가 생전에 남긴 ‘눈먼 암살자’라는 제목의 SF 환상소설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작품 전체의 은유적 구조를 형성한다.
아이리스의 서사는 자서전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회상은 단선적이지 않다.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감정과 기억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어 있어 독자는 과거의 진실을 조각 맞추듯 따라가야 한다. 여기에 로라의 소설이 병치되면서, 픽션과 현실, 환상과 사실, 숨겨진 진실과 드러나는 기억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로라의 소설은 외계 행성, 노예 여성, 혁명가, 눈먼 암살자라는 설정으로 구성된 SF물이지만, 이 안에는 두 자매의 삶과 고통, 특히 로라의 내면이 은유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애트우드는 이처럼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구조를 통해, 진실이란 무엇인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이야기가 기억되고 어떤 이야기는 사라지는가에 대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특히 아이리스가 나이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행위는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목소리를 되찾으려는 문학적 복원 작업이자, 여성 서사의 재정립 시도라 볼 수 있다. 눈먼 암살자의 다층 서사는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니라, 기억과 진실, 권력과 언어의 관계를 질문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전통적인 여성 역할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아이리스와 로라라는 두 자매 간의 관계다. 이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시대와 사회의 억압을 경험하지만, 반응하는 방식은 매우 다르다. 아이리스는 가문의 유산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유한 리처드와 정략결혼을 하며,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는 인물로 살아간다. 반면 로라는 도덕적 이상주의자이자 감성적인 인물로, 주변 세계의 위선과 불의를 날카롭게 인식하며 때때로 충동적으로 저항한다.
로라는 겉보기에는 순진하고 감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덕적 직관이 매우 강하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녀는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침묵과 행동으로 저항한다. 특히 그녀가 집필한 '눈먼 암살자' 속 여성 캐릭터는 현실 세계에서 로라 자신과, 아이리스가 겪은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도구다. 이 소설 안의 여성은 지배당하며 침묵하지만, 결국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권력에 도전한다.
아이리스는 처음에는 로라의 선택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를 보호하거나 억제하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로라가 남긴 소설을 통해 그녀의 의도를 깨닫고, 자신의 침묵과 방관이 동생의 비극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직면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여성 주체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아이리스가 노년에 와서 자신의 목소리로 서사를 다시 쓰는 행위는, 오랜 침묵과 억압 끝에 찾아온 저항의 표현이자, 여성 문학의 자기복원적 서사로 읽힌다.
또한 두 인물의 대비는 애트우드가 전통적인 여성 역할과 그 해체를 어떻게 문학적으로 구현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리스는 ‘적응’의 상징이고, 로라는 ‘저항’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는 아이리스가 실은 가장 강인한 목소리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결국 진실을 기록하고 말함으로써, 침묵이 아닌 언어로 저항한다. 이 과정은 여성의 자율성, 목소리, 그리고 서사의 권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권력 구조 기억과 서사의 정치성
눈먼 암살자는 단지 여성 간의 이야기나 개인적인 고통의 기록이 아니다. 이 소설은 가족, 국가, 제국주의, 계급, 젠더 권력 구조 등 더 넓은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정치적 소설이다. 특히 체이스 가문의 몰락은 캐나다의 산업자본주의 몰락과도 연결되며, 리처드 그리핀이라는 인물은 당시의 가부장적 권력, 경제권력, 성적 지배를 모두 상징하는 인물로 작용한다. 그는 단지 폭력적인 남편이 아니라, 여성의 육체와 삶을 상품화하고 지배하려는 전체 권력 구조의 축소판이다.
이 작품에서 애트우드는 진실이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젠더에 따라 기억이 왜곡되고, 여성의 경험은 배제되거나 무시된다. 아이리스가 과거를 회상하며 서사를 복원하는 것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삭제된 여성의 진실을 복원하는 정치적, 문학적 행위이다.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로라가 아니라, 오랜 시간 침묵해온 아이리스이며, 그녀는 노년의 언어로 과거를 복기하며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눈먼 암살자는 문학적으로도 매우 도전적인 형식 실험을 시도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현실과 픽션, 기사, 신문 보도, 편지, 회상 등이 뒤섞이며 독자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퍼즐을 맞춰야 한다. 이처럼 복합적인 구조는 단지 독창적인 기법을 넘어서, 기억과 서사의 정치성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전략이다. 독자는 '무엇이 사실인가'보다는,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가'에 주목하게 된다. 이로써 애트우드는 문학이 단지 아름다움이나 감정의 전달을 넘어, 권력과 진실의 장(場)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오늘날 눈먼 암살자는 여성 서사, 기억의 정치학, 문학의 자율성과 저항성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애트우드는 이 작품을 통해 ‘침묵은 말하게 될 때 저항이 된다’는 문학적 진실을 일깨우며, 독자에게 서사의 권리를 되돌려준다. 그리하여 눈먼 암살자는 단지 한 자매의 비극이 아니라, 여성 문학의 선언이며, 침묵 너머 존재하는 모든 목소리를 위한 송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