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뮤얼 존슨의 라셀라스(Rasselas)는 1759년에 발표된 철학적 우화 소설로, 행복, 인간 조건, 삶의 목적에 대한 깊은 탐구를 담고 있다. 존슨은 이 작품을 단기간에 집필했으며,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된 창작물을 넘어, 당대의 계몽주의적 사고,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 그리고 개인의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는 문제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왕자가 “이상적인 삶”을 찾아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지만, 실상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 자체가 얼마나 모순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해부하는 철학적 여정이다. 라셀라스는 이야기보다는 사유를 중심으로 구성된 작품이며, 독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끝까지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로써 작품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진다. 본문에서는 철학적 탐험, 여성의 시각, 사유의 깊이와 갈등을 통해 작품을 알아보고자 한다.
소설 라셀라스 속 철학적 탐험
라셀라스의 서사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그는 에티오피아의 왕자로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물질적 편의와 안락함을 누리고 있다. 그는 '행복의 계곡(Valley of Happiness)'이라 불리는 낙원에서 자라나지만, 점차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이상적인 삶'—고통이 없고, 원하는 것이 모두 충족되며, 사회적 지위도 보장된 삶—이 실제로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모순이 작품의 출발점이다.
라셀라스는 이 공허함을 해결하기 위해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아 계곡을 탈출하고, 문명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의 동행자로는 지혜로운 철학자 이믈라크(Imlach)와 누이인 네키아(Nekayah)가 있다. 이들의 여정은 고전적인 모험 서사의 전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삶의 방식, 직업, 사회 제도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철학적 탐험이다.
라셀라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지를 목격한다. 학자, 정치가, 은둔자, 수도사, 상인, 예술가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존슨은 각각의 삶의 방식이 처음에는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나름의 고통과 결핍을 안고 있음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정치가는 권력을 얻기 위해 자기 삶을 소진하고, 은둔자는 세상을 피하지만 고독 속에서 무너진다. 학자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끝없는 질문 속에서 회의에 빠지고, 수도사는 신을 향한 믿음 속에서도 인간적 번민을 떨치지 못한다.
이러한 전개는 독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어떤 삶도 완전하지 않다는 진실을 천천히 들춰낸다. 존슨은 이상적인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냉정한 결론을 향해 독자를 이끈다. 라셀라스의 여정은 단순한 진로 탐색이 아니라, 존재론적 탐색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행복의 계곡’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삶의 본질적 결핍일 수 있다.
여성의 시각 삶의 복잡성
라셀라스는 명백히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 있지만, 그 본질은 철학적 에세이에 가깝다. 새뮤얼 존슨은 이야기보다 사유를 중심에 놓고,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삶의 본질, 고통의 불가피성, 행복의 상대성에 대해 치밀하게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철학자 이믈라크이다. 그는 라셀라스에게 지적 통찰을 제공하고, 현실을 관찰하는 눈을 열어주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이믈라크는 행복이란 결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 내부의 의식, 인식, 성찰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그가 갖지 못한 것을 원하며, 그가 가진 것은 금세 지루해진다." 이 말은 라셀라스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된 존재이며, 삶이란 그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끊임없는 시도라는 것이다.
네키아는 또 다른 철학적 시선을 제시한다. 그녀는 여성의 시선에서 가정, 결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질문하며, 특히 여성으로서의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녀는 아이들의 교육, 여성의 억압된 지위, 가족의 해체 등을 지적하며, 단지 ‘삶의 방식’이 아닌, ‘삶을 둘러싼 조건’ 자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이는 당시의 문학에서 매우 드문 시도였으며, 존슨이 의도적으로 여성의 시각을 담으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믈라크와 네키아의 시선은 라셀라스가 마주하는 삶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들은 단지 조언자가 아니라, 각기 다른 철학적 전통과 실존적 고민을 반영하는 인물들이다. 존슨은 이들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갈등과 불안의 근원을 묘사하고, 그것이 단순히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 조건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결국 라셀라스가 찾아 나선 ‘완벽한 삶’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삶에는 고통과 환멸이 포함되어 있다. 이 결론은 비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존슨은 그것이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오는 자유라고 말한다. 인간은 완벽한 행복을 누릴 수 없지만, 그 한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오히려 더 깊어질 수 있다. 이러한 사유는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니체, 사르트르의 논의와도 맞닿아 있다.
사유의 깊이와 갈등 질문 자체의 가치
라셀라스의 마지막 장면은 극적인 결말이나 교훈적 마무리가 아닌, 조용한 성찰로 끝난다. 라셀라스와 그의 일행은 ‘각자의 인생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들의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에 머물며,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존슨은 여기서 진정한 삶의 모습은 계획이 아니라, 그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유의 깊이와 갈등에 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이 독특한 이유는, 우리가 기대하는 플롯의 클라이맥스나 해소 없이 끝난다는 점이다. 이는 존슨이 추구한 문학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그는 문학을 통해 인간의 삶을 미화하거나 단순화하지 않았으며, 현실의 복잡성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 했다. 라셀라스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의 연속이며, 어떤 결론보다 질문 자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작품이다.
문학사적으로 라셀라스는 계몽주의 시기와 낭만주의 시기의 경계에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편으로는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감정, 불안, 실존적 고통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후대의 철학적 소설, 특히 도스토옙스키, 토마스 만, 카뮈의 작품들과도 연결된다. 존슨은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보되, 그 이성조차 종종 모순되고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한 작가였다.
결국 라셀라스는 우리가 살면서 흔히 품는 질문—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삶에 정답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사유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단지 라셀라스의 것이 아니라, 독자 각자의 것이기도 하다. 라셀라스는 하나의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 질문을 다시 쓰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읽는 이마다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며,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살아 있는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