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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리스본의 겨울 속 음악적 구조, 기억과 감정의 구조, 망명자

by anmoklove 2025. 11. 18.

소설 리스본의 겨울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의 리스본의 겨울은 현대 스페인 문학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며, 음악, 사랑, 기억, 정체성, 정치적 망명 등의 주제를 누아르적 서사와 재즈 리듬에 실어 전달하는 탁월한 문학적 시도이다. 이 작품은 플롯의 전개보다는 리듬과 감각, 감정의 중첩을 통해 독자의 내면을 울리는 서사적 음악과도 같다. 리스본의 겨울은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여러 개의 단편적 기억과 장면들이 중첩되어 구성된 모자이크처럼 구성되어 있다. 몰리나는 독자에게 고정된 진실이나 분명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잊혀진 장면과 뒤섞인 기억의 조각들을 제공하며, 그 틈을 독자가 채워나가도록 유도한다.

소설의 주된 줄거리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와 한 여인, 그리고 스페인 내전의 그림자 속에서 유럽을 떠도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서사는 정체성의 불확실성, 망각과 기억의 충돌, 음악과 감정의 유사성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며,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독특한 정서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글에서는 리스본의 겨울을 세 가지 측면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첫째, 재즈의 리듬과 소설 문체의 유사성. 둘째, 기억과 상실, 시간의 왜곡된 서사 구조. 셋째, 정치적 망명자와 분열된 정체성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몰리나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예술과 정치, 사랑과 상실이라는 경계 위에서 정교하게 직조하며, 서사의 리듬을 통해 새로운 독서 체험을 선사한다. 이에 본문을 음악적 구조, 기억과 감정의 구조, 망명자 이라는 세 가지의 소제목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소설 리스본의 겨울 속 음악적 구조

리스본의 겨울은 문체와 구성 방식에서 명백하게 재즈 음악의 구조를 닮아 있다. 재즈는 즉흥성과 변주, 반복과 전개, 그리고 불연속적인 흐름을 그 핵심 특성으로 가지며, 몰리나는 이러한 음악적 구조를 문학 서사에 그대로 이식한다. 주인공인 재즈 피아니스트 빌라르와 그가 사랑한 여성 루자노는 삶과 사랑, 시간 속에서 리듬을 찾고자 하지만, 이 리듬은 안정된 선율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뒤틀린 즉흥 연주에 가깝다.

소설의 서사는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다양한 시간대와 공간이 교차하며 파편적으로 구성된다. 독자는 현재의 장면을 읽다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고, 또다시 현재와 미래 사이를 오가며, 인물들의 기억 속에 떠도는 잔향들을 따라가게 된다. 이처럼 구성된 문체는 마치 재즈의 아날로그적 리듬처럼 일정한 반복과 이탈을 거듭하며, 독자에게 감각적 혼란과 동시에 몰입을 선사한다.

몰리나는 문장을 리듬으로 쓴다. 짧은 단문과 장문의 흐름이 교차하며, 대화체와 서술체가 자유롭게 혼합된다. 이는 재즈 음악에서 전통적 조성과 불협화음이 교차하며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러한 문체는 단순히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 상태와 기억의 흐름을 표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빌라르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느끼는 감정과, 루자노와의 감정적 연결은 언어가 아닌 음의 흐름을 통해 전달되며, 몰리나는 이 언어 바깥의 언어를 글 속에 구현해낸다.

기억과 감정의 구조 인간의 정체성

이 작품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몰리나는 의도적으로 시간의 층위를 해체하며, 인물들의 기억과 상실이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시간 구조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독자는 과거와 현재, 심지어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되는 방식’에 집중하게 된다. 이는 문학이 더 이상 절대적 진실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 기억의 불확실성과 정서를 기록하는 매체임을 선언하는 방식이다.

소설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바로 ‘기억’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과거에 집착하며, 잃어버린 시간과 인물을 되찾으려 하지만, 그 기억은 항상 불완전하고 왜곡되어 있다. 루자노는 과거의 연인이며, 동시에 현재의 망령과도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그녀는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면서도, 주인공의 감정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몰리나는 이 인물을 통해 ‘사랑’과 ‘상실’, ‘기억’과 ‘망각’이 얼마나 얽히고설킨 개념인지를 탐색한다.

이러한 시간 구조와 기억의 모티프는 독자에게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해석을 요구한다. 무엇이 과거이고 무엇이 현재인가? 우리가 기억하는 그 순간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감정이 만들어낸 허상인가? 몰리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과 감정의 구조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시간은 일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이며, 기억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끝없는 소환이다. 몰리나는 사랑의 상처와 기억의 그림자를 겹쳐놓음으로써, 인간의 정체성이란 잃어버린 것들의 궤적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암시한다.

망명자 문학적 교향곡

리스본의 겨울은 단지 개인적인 사랑과 상실을 다룬 작품이 아니다. 이 소설은 20세기 후반 유럽,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겪은 정치적 혼란과 망명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망명자’이며, 이는 단지 국경의 이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해체를 상징한다. 빌라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음악에 투영하며 현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루자노는 정치적 갈등과 개인적 사랑 사이에서 파괴된 자아를 지닌 인물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정체성의 경계에 서 있다. 그들은 유럽 대륙의 한 구석에서 유랑하듯 존재하며, 고정된 장소나 역할이 없다. 몰리나는 이를 통해 전통적 국가, 민족, 정체성의 개념을 해체하며,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 리스본이라는 도시는 이러한 정체성의 경계지대이며, 역사와 문화가 뒤섞인 공간이다. 몰리나는 리스본을 단순한 도시가 아닌, 시간과 기억, 현실과 환상의 경계로 그려낸다.

또한 이 작품은 예술가의 삶을 통해 ‘저항’과 ‘자유’의 의미를 탐색한다. 예술은 정치에 복무하지 않지만, 동시에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빌라르의 재즈는 체제를 향한 직접적 저항이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분명히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리듬을 지닌다. 몰리나는 재즈라는 장르를 통해, 고정된 구조를 거부하고, 즉흥성과 창조성, 자유와 해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는 소설 전체의 미학과도 일치하며, 이 작품이 단지 서사 이상의 정치적, 예술적 선언임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리스본의 겨울은 기억과 음악, 사랑과 상실, 망명과 정체성의 문제를 정교하게 얽어낸 문학적 교향곡이다. 몰리나는 이 작품을 통해, 문학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어떻게 인간의 존재를 담아낼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하나의 리듬이자 감정의 지도이며, 독자로 하여금 언어로 구성된 음악을 듣게 만든다. 리스본의 겨울은 잊힌 것들의 회상이며, 상실된 것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여정이고, 그 여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