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머싯 몸의 면도날은 20세기 초반 서구 문명의 전환기,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허무주의와 개인의 구도적 탐색이라는 시대정신을 깊이 있게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성장소설이나 로맨스가 아닌, 전쟁을 겪은 한 젊은 남자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며 내면의 길을 모색하는 철학적 서사이다. 작가인 서머싯 몸은 작품 속에 화자이자 관찰자로 직접 등장하며, 등장인물들의 삶을 중립적으로 지켜보는 동시에 독자에게 인간의 다양한 삶의 선택지를 펼쳐 보인다.
이 소설의 중심에는 라리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전쟁 후 평범한 사회로 복귀하는 대신, 삶의 의미를 찾아 유럽과 인도 등지를 떠돈다. 그와 대비되는 인물들—이사벨, 엘리엇, 그레이—은 모두 세속적 가치와 물질주의적 삶을 추구하지만,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한계에 부딪히거나 무너진다. 라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탐구의 길에 나서지만, 그 길은 쉽지 않고, 때로 고독과 무의미에 직면하는 고통의 여정이다. 면도날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삶의 길이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하고 섬세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글에서는 면도날을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다. 첫째, 라리의 영적 여정과 자아 발견. 둘째, 세속적 인물들과의 대비를 통한 주제 전개. 셋째, 서머싯 몸의 서술 전략과 시선의 윤리성이다. 이 작품은 단지 한 인물의 선택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고전적 작품이다. 본문에서는 자신만의 여정, 구도자형 인물, 인간의 삶 라는 세가지 소제목으로 글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소설 면도날 속 자신만의 여정
라리는 젊고 유능한 미국 청년이다. 전쟁 중 조종사로 복무하며 극한의 공포와 죽음을 체험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기존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부유한 가정과 약혼녀 이사벨이 기다리는 안락한 삶을 뒤로 하고, 그는 "나는 생각하고 싶다"라는 짧고 단호한 말로 자신만의 여정을 선택한다. 이는 단순한 휴식이나 방황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구도적 결단이다.
라리는 프랑스의 작은 도서관에서 철학과 종교를 공부하고, 독일과 인도 등지를 떠돌며 다양한 사상과 문화, 삶의 형태를 접한다. 그는 육체적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유럽의 사변적 철학에서부터 힌두교와 불교, 명상 등의 동양 사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유의 여정을 밟는다. 특히 인도에서의 수련과 요가적 체험은 그에게 깊은 내면의 평온과 통찰을 안겨준다. 그는 삶과 죽음, 고통과 기쁨, 집착과 해탈의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탐색하며, 점차 외적 성공보다 내적 충만이 더 본질적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 여정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그는 고독 속에서 자주 좌절하고, 사회적 소속감과 관계의 단절 속에서 인간적 고통을 겪는다. 또한, 그가 추구하는 진리는 타인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그로 인해 그는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는 단절을 경험한다. 면도날 위를 걷는 듯한 이 삶은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라리는 그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성해 가는 것임을 배운다. 그의 여정은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내면의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읽힌다. 서머싯 몸은 이 인물을 통해 ‘현대적 성자’의 가능성을 탐색하며, 인간이 물질과 성공이 아닌 내면의 빛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다.
구도자형 인물 세속적 삶
면도날은 라리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라리를 중심으로, 그와 대비되는 다양한 삶의 양식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사벨은 라리의 약혼녀로, 그를 사랑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그녀는 라리와 결별하고, 대신 그레이와 결혼하여 안정적인 삶을 선택한다. 이사벨은 지적이고 세련된 여성이지만, 그녀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세속적 욕망과 안락함에 기초하고 있다. 그녀는 라리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결국 자기 자신조차도 속이며 살아간다.
엘리엇은 이사벨의 삼촌으로, 유럽 사교계의 귀족적 문화에 몰두하며, 삶을 화려한 외양으로 꾸미는 데 집착한다. 그는 철저히 외적 세계에 매몰된 인물이며, 타인의 인정과 지위, 명예를 삶의 가치로 삼는다. 그러나 말년의 병과 외로움 속에서, 그가 쌓아올린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그의 죽음은 물질적 성공과 사회적 명망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위기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레이는 이사벨의 남편으로, 사업가이자 상징적 미국인의 전형이다. 그는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몰락의 고통을 겪으며,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는다. 그의 몰락은 단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의 한계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는 다시 회복되지만, 그 삶은 여전히 외부 환경에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한 삶이다. 라리와 달리, 그레이는 내적 자립이나 철학적 통찰을 갖지 못한 채, 시스템의 일부분으로 살아간다.
이처럼 면도날은 라리라는 구도자형 인물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유형의 세속적 삶을 제시하며,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서머싯 몸은 이 인물들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이 가진 제한과 맹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라리를 부정하거나 동정하지만, 끝내 그의 내면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 작품은 진정한 자유와 충만함은 외부 세계가 아닌, 자기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제시한다.
인간의 삶 진정한 성공
면도날의 독특한 점은 작가인 서머싯 몸 자신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작중 화자일 뿐만 아니라, 실제 인물로서 등장인물들과 교류하며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 서술 전략은 독자에게 ‘실제 있었던 사건’처럼 느껴지게 만들며, 라리의 삶을 일종의 사례 연구처럼 바라보게 만든다. 몸은 모든 인물에게 고르게 접근하며, 누구도 이상화하거나 과도하게 비판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중립적이며 사려 깊고, 때로 유머러스하다.
몸은 라리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가능한 길은 아님을 인정한다. 그는 엘리엇의 허영을 지적하지만, 동시에 그의 인간적인 고독을 연민한다. 이사벨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녀의 현실적 판단을 이해하려 한다. 이러한 시선은 작가가 독자에게 특정한 가치를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윤리적 문학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삶에 대해 성찰하게 만들며, 라리의 여정을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하되, 그것이 보편적 진리는 아님을 암시한다.
이와 함께, 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품격 있는 유려함을 지닌다. 복잡한 철학적 주제와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면서도, 지나친 추상화나 난해함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서사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며, 인물 간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주제를 전달한다. 이 점에서 면도날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면도날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문학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서머싯 몸은 라리를 통해, 개인이 자신의 길을 찾고자 할 때 감당해야 하는 고독과 통찰의 대가를 보여주며, 동시에 세속적 삶의 안락함 속에 숨어 있는 공허함도 함께 드러낸다. 면도날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던지는 문학적 나침반이다. 그것은 모든 이가 따를 수는 없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해야 할 내면의 칼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