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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모래의 여자 속 구덩이, 온순한 억압, 자유의 역설

by anmoklove 2025. 11. 18.

소설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20세기 일본 문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작품으로, 실존주의와 부조리 문학의 요소를 깊이 있게 반영한 심리적 소설이다. 이 작품은 한 남자가 모래 구덩이에 갇혀 생활하게 되는 설정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과 자유의 의미,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충돌을 묘사한다. 간결하면서도 서늘한 문체, 압도적인 상징성, 폐쇄된 공간의 반복적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직면하게 만든다.

소설은 일종의 ‘실험’처럼 전개된다. 이름 없는 주인공은 곤충 채집을 위해 외딴 해안 마을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낯선 여성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러나 이 집은 모래 구덩이 안에 위치해 있으며, 이틀이 지나도 그는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이 구덩이에 가두고, 여인과 함께 모래를 퍼올리는 노동을 강요한다. 이 극단적 상황은 주인공의 자유 의지를 시험하는 장치가 되며, 점차 그를 외적 세계로부터 단절시켜간다. 이 글에서는 모래의 여자를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다. 첫째, 실존적 상황으로서의 구덩이와 모래의 세계. 둘째, 여인의 상징성과 성적 은유. 셋째, 자유의 해체와 인간 존재의 수용이라는 철학적 지점이다. 아베 코보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처한 본질적 조건과 그 조건 속에서의 ‘순응 혹은 저항’을 섬세하게 탐색한다. 이에 본문을 구덩이, 온순한 억압, 자유의 역설 이라는 세 가지의 소제목으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구덩이

소설의 무대는 모래에 잠식되어 가는 마을의 한 구덩이다. 이 구덩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을 압축한 상징적 공간이다. 주인공이 이 구덩이에 갇히게 되는 순간, 그는 이전까지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인간 관계, 모든 규범으로부터 단절된다.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끊기고, 시계와 전기도 없는 공간에서 그는 ‘존재한다는 것’ 자체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이 구덩이는 탈시간적이고 탈공간적인 장소로 기능한다. 주인공은 매일 반복적으로 모래를 퍼내는 작업에 참여해야 하며, 이 노동은 아무런 성취도, 보상도 없는 무의미한 반복이다. 그러나 바로 이 반복이 그에게 점차 현실이 된다. 아베 코보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부조리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카프카의 심판이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처럼—을 활용하면서도, 일본 사회의 집단주의와 순응 문화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다.

구덩이는 인간이 처한 실존적 감옥이자, 자유가 허상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상징한다. 처음에는 탈출을 시도하던 주인공이 점차 체념하고, 결국 이 생활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실존의 조건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적응과 순응’을 내면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구덩이는 인간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제도와 관습, 무의식적인 사회적 감옥이며, 모래는 그것을 끊임없이 ‘덮어버리는’ 요소다. 이 모래는 현실의 억압일 수도, 무의식일 수도 있으며, 인간의 노력을 삼켜버리는 자연의 힘으로도 읽힌다.

온순한 억압 인간 존재의 양가성

주인공이 갇힌 공간에서 유일한 인간 관계는 ‘여자’와의 동거이다. 그녀는 이 세계에 오래도록 순응하며 살아온 인물로, 모래를 퍼내는 노동에 익숙하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이 세계의 질서 자체를 체현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주인공을 구속하는 ‘온순한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여성과의 관계는 단순한 성적 충동을 넘어선다. 초기에 주인공은 그녀에게 분노하고, 무력감을 느끼며, 결국은 그녀를 욕망하게 된다. 이 욕망은 단지 성적 에너지의 발현이 아니라, 그의 무기력한 현실에 대한 탈출구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욕망이야말로 그를 이 세계에 ‘붙잡아 두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아베 코보는 성과 욕망이 해방이 아니라 구속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모순을 정교하게 짚어낸다.

여성은 동시에 모래와 동일시된다. 그녀는 언제나 모래에 덮여 있고, 그녀의 집은 모래 속에 침식되어 간다. 그녀의 신체는 모래처럼 부서질 듯 연약하면서도, 모래처럼 끈질기고 불가해하다. 이러한 묘사는 여성과 자연, 모성과 대지, 억압과 순응의 다층적 상징 구조를 형성하며, 독자로 하여금 이 여성의 존재를 단순히 피해자로 보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체계에 종속되었지만, 동시에 체계를 유지시키는 힘이며, 주인공보다 더 능동적으로 이 공간을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여성은 주인공에게 일종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그녀를 통해 그는 자신의 무력함과 욕망, 기대, 실존적 조건을 직면하게 되며, 그녀와의 관계는 결국 그가 이 공간에 남기로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 아베 코보는 여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양가성을 보여준다. 억압과 구속이 곧 생존의 조건이 되며, 자유를 추구하던 인간이 오히려 억압 속에서 안정과 정체성을 찾게 되는 아이러니를 정교하게 구축한다.

자유의 역설 실존적 결단

소설의 후반부, 주인공은 드디어 탈출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지만, 독자는 그가 이미 ‘그곳의 삶에 적응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처음에는 억압과 공포, 혐오의 대상이었던 공간이 이제는 안정과 소속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그는 이 세계의 질서에 동화되었고, 그의 ‘자유 의지’는 더 이상 외부로의 도피가 아닌, 내부에서의 생존 전략으로 변형된다.

이러한 결말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 주제인 ‘자유의 역설’을 강하게 드러낸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는 고통과 불안을 수반하며, 오히려 억압 속에서 안락함을 느끼게 된다. 모래의 여자는 자유가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책임과 불안을 동반하는 무거운 짐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베 코보는 주인공이 이 공간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존재 방식을 수용했다고 본다.

그는 기존의 사회에서 기대되던 정체성—교사, 남성, 시민, 주체—을 내려놓고, 새로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이러한 수용은 체념이라기보다, 실존적 각성에 가깝다. 그는 더 이상 외부 세계에 구속되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재구성한다. 이러한 결론은 단지 ‘비극적 종말’이 아니라, 인간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한 실존적 결단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모래의 여자는 부조리극과 심리소설, 실존철학이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한 작품이다. 아베 코보는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 조건—고립, 억압, 자유, 순응, 욕망—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은 문학이 인간 삶의 심연을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며, 현대인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강렬한 메타포로 기능한다. 모래의 여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며, 어디에 소속되고자 하는지를 묻는 서늘한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