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한국 현대 문학에서 보기 드문 독창적인 서사 구조와 장르 결합을 통해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귀신을 보고 퇴치하는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이 학교라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이는 활약은 얼핏 유쾌한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상처, 사회의 단면, 젠더 문제, 성장의 통증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장르적 흥미와 더불어 문학적 깊이를 갖추고 있어 단순한 오락소설의 경계를 넘어서며, 정세랑 특유의 감각적 문체와 섬세한 시선이 돋보인다. 본 분석에서는 이 작품을 구성하는 세 가지 축, 즉 ‘판타지와 일상의 공존’, ‘여성 서사와 젠더 감수성’, 그리고 ‘치유의 세계관과 문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 속 판타지 세계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가장 인상 깊은 설정은, 안은영이라는 주인공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즉 귀신이나 저주, 남겨진 감정의 찌꺼기 등을 젤리 형태로 시각화해서 보고, 이를 퇴치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젤리들은 각각 다른 색, 밀도, 움직임, 크기로 표현되며, 누군가의 죽음, 감정, 상처, 혹은 억눌린 욕망의 결과로 생성된다. 이 설정은 독자에게 신선한 판타지 세계를 제공하는 동시에, 현실의 보이지 않는 감정과 문제들을 가시화해 보여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단지 귀신이 무섭거나 나쁜 존재라는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퇴치해야 할 감정’이라는 접근 방식은 문학적으로도 상징성이 크다.
예컨대 학교 복도나 운동장에 떠도는 젤리들은 학생들이 겪은 외로움, 경쟁 속에서 생긴 불안, 교사의 무관심, 입시 스트레스 등이 응집된 결과로 나타난다. 이처럼 젤리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감정의 부산물이며, 사회적 구조가 만든 압력의 시각적 결과물이다. 안은영은 이 젤리들을 전자충격기, 플라스틱 칼, 혹은 초록색 미끈한 액체 같은 판타지적 도구로 제거하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악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녀의 역할은 단지 악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런 설정은 판타지와 일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독자에게도 삶의 이면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을 종종 외면한다. 누군가의 슬픔, 분노, 좌절은 대화나 제도 안에서 소화되지 못하고, 무형의 공기로만 흩어진다. 정세랑은 이 소설을 통해 그러한 감정의 잔해를 ‘젤리’라는 가시적 형태로 형상화하고, 그에 반응하고 돌보는 주체로 안은영을 세운다. 이 점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은 단순한 장르소설이 아니라, 감정의 사회적 치유와 시선을 다룬 사회심리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학교라는 공간을 매우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학교는 한 사회의 축소판이며, 다양한 계층, 가치, 억압, 기대가 교차하는 장소다. 그런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유독 강하게 출현하는 설정은 현실에 대한 우화로 기능한다. 우리 사회가 감정과 정서를 소외시키는 방식, 경쟁 중심의 교육 체제, 청소년의 정체성 위기 등을 젤리라는 기발한 매개체를 통해 문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정세랑은 이러한 구성을 통해 판타지 장르가 단지 허구가 아닌 현실을 해석하는 렌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 서사와 젠더 감수성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안은영은 전형적인 히어로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화려한 초능력을 휘두르거나, 권력을 장악하거나, 대립 구도를 정면으로 타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학교라는 조직 내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역할을 감당하며, 가능한 한 갈등 없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태도는 정세랑이 일관되게 구축해온 ‘현대 여성 주체’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그녀는 강하되 공격적이지 않고, 독립적이되 타인과의 연대를 포기하지 않으며,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정세랑은 이 작품을 통해, 지금까지 한국 문학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실제적인 여성의 일상’과 ‘비폭력적 주체성’을 제시한다. 안은영은 교사로서, 여성으로서, 초능력자로서 매우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동시에 어디에도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특히 그녀가 자신의 능력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과시하거나 무기로 삼지 않는 태도는 ‘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보여준다. 이는 정세랑 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가치이기도 하다. ‘강함’은 외형이나 물리적 위력이 아니라, 공감과 선택, 책임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인식이다.
또한 이 소설은 여성 서사 내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를 지양하고, 다양한 여성 인물을 다층적으로 그린다. 안은영 외에도 학생, 동료 교사, 학부모 등 다양한 여성 인물이 등장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갈등과 성장을 겪는다. 이들은 서로를 돕거나, 때로 갈등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성적 감각과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안은영이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섬세한 배려와 개입은 교사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여성 주체로서의 돌봄과 감정 노동이 어떻게 사회 안에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남성 캐릭터인 ‘한문교사 홍인표’와의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전형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처럼 안은영을 구원하거나 이끄는 역할이 아니라, 그녀와 나란히 걷고 때로는 힘을 나누는 동반자로 묘사된다. 이 관계는 남녀 주인공 사이의 권력 불균형이 아니라, 대등한 협업과 존중을 통해 구성된다. 이러한 설정은 기존의 남성 중심 서사 구조를 전복하며, 젠더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서사를 제시한다.
결국 보건교사 안은영은 단지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이 아니라, 여성적 감각과 세계관을 통해 현실을 읽고, 그 현실을 돌보는 방식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정세랑은 이를 통해 문학이 젠더 문제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서사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상호 이해와 공존을 지향하는 보편적 서사로 기능한다.
치유의 문학 돌봄의 서사
정세랑의 문체는 흔히 ‘가볍다’ 혹은 ‘경쾌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스타일일 뿐, 그녀의 문장은 실은 굉장히 치밀하고 정서적으로 풍부하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그녀의 문체는 복잡한 주제를 감정적으로 부담 없이 풀어내며,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묘사, 유머와 따뜻함이 공존하는 어휘 선택, 과하지 않은 서술 등이 이러한 효과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문체적 태도이며, 독자에게는 일종의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서사 구조 면에서도 이 작품은 독특하다. 장편소설이지만 각 장이 에피소드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이 안은영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엮인다. 이 구조는 독자가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며, 동시에 안은영이라는 인물의 내면과 성장 과정을 점진적으로 드러낸다. 사건마다 중심 인물이나 갈등은 달라지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핵심에는 ‘감정의 해소’와 ‘돌봄’이라는 주제가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 메시지 중 하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소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젤리를 제거하는 것이 단순히 ‘악을 물리치는 전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젤리가 생겼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이 어떤 감정의 산물인지를 읽어내는 과정이 동반된다. 이는 곧 작가가 말하는 치유의 문학, 혹은 ‘돌봄의 서사’와 맞닿아 있다.
정세랑의 세계에는 뚜렷한 선악이 없다. 대신 각자의 고유한 사연과 감정이 있고, 안은영은 그것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들여다본다. 그녀의 대응 방식은 처벌이나 단절이 아니라, 이해와 수용이다.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수많은 갈등 상황에서도 적용 가능한 태도로, 독자에게 실천 가능한 감정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보건교사 안은영은 문학이 어떻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어도, 현실을 견디게 해줄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세랑은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지나치는 작고 사소한 감정들을 이야기로 엮고, 그것을 통해 독자가 자기 삶의 작은 단면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는 진정한 문학의 기능이며, 작가가 작품 안에 심어놓은 가장 조용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다.
결론: 판타지라는 언어로 기록한 현실의 상처와 연대의 가능성
보건교사 안은영은 단순한 퇴마물도, 유쾌한 판타지만도 아니다. 이 소설은 보이지 않는 감정, 외면된 상처, 이름 붙일 수 없는 외로움을 이야기로 끌어올려, 그것을 돌보고 감싸안는 문학의 힘을 보여준다. 정세랑은 귀신과 젤리라는 장르적 장치를 통해 현실을 더욱 깊이 있게 바라보게 하며, 여성 주체의 성장과 치유의 세계관을 독창적으로 구현했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제안하며, 결국 문학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이해와 공감’을 조용히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