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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속 반전 구조, 병수의 치매, 선악의 구분

by anmoklove 2025. 11. 6.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존의 범죄 스릴러 장르를 전복하면서, 치매라는 독특한 서술 장치를 통해 인간의 기억, 정체성, 윤리 의식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연쇄살인범이자 치매 노인인 주인공 '병수'의 시점을 따라가며, 독자가 믿을 수 없는 서술자를 통해 진실을 추리하게 만든다. 반전의 구조와 기억의 왜곡, 그리고 정의와 복수의 경계에 선 윤리적 질문은 이 작품을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선 문학으로 만들어준다. 본문에서는 이 소설의 서사 구조와 반전 장치, 치매라는 내러티브 도구, 그리고 윤리적 질문이 갖는 문학적 함의를 중점적으로 분석한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속 반전 구조

살인자의 기억법은 첫 문장부터 독자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나는 살인자였다.”라는 병수의 독백은 주인공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며, 독자를 기존 서사의 안정된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이 작품은 과거에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노인이 현재는 치매를 앓으며 새로운 살인 사건을 의심하고, 이를 막으려 하는 구조를 따른다. 그러나 김영하는 단순한 추리적 전개가 아니라, 서술자 시점의 불안정성과 기억의 틈을 교묘하게 활용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퍼즐을 조립하듯 진실을 찾아가게 만든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독자가 ‘병수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이다. 병수는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을 수정하거나, 이전에 했던 말을 번복한다. 그가 진짜 살인자인지, 혹은 자신이 생각하는 짐작이 옳은지 독자는 확신할 수 없다. 이는 독자가 서사를 소비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진실은 누구의 시선으로 구성되는가?” 라는 질문은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서, 문학적 서사에서의 진실성과 주관성을 성찰하게 만든다.

반전 구조 또한 이 소설의 핵심이다.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밝혀지는 사실들, 병수가 의심하던 인물이 실제로 범인이 맞는지 여부, 과거에 병수가 저질렀던 일들의 진위 여부는 독자의 해석을 뒤흔든다. 김영하는 이를 통해 고정된 인물 평가와 사건 해석의 틀을 깨뜨리며, 결말까지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문학적 몰입을 유도한다.

결국 살인자의 기억법은 반전이 있는 스릴러라기보다, 서사의 불완전성을 문학적으로 활용한 심리 서사에 가깝다. 이야기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 기억의 조작 가능성, 서술자의 주관성과 의심은 모두 독자 스스로가 능동적인 해석자가 되게 만든다. 이는 김영하 특유의 ‘독자와의 심리 게임’이자, 기존의 소설 형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적 서사로 평가받을 수 있다.

병수의 치매 서술 방식

살인자의 기억법의 가장 독창적인 서사 장치는 바로 주인공의 ‘치매’ 설정이다. 치매는 단순한 배경이나 설정이 아닌, 이 소설의 서술 구조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장치다. 병수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연쇄살인을 '기억'하며, 동시에 그 기억이 정확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그는 끊임없이 기록을 남기고 메모하며 현실을 정리하려 하지만, 자신의 판단마저도 의심하게 된다. 이처럼 기억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진 시점에서 독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서사의 중심축은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Unreliable Narrator)’라는 문학적 기법 위에 구축된다.

병수의 치매는 단순히 인지 기능의 저하가 아니라, 정체성의 해체를 의미한다. 과거의 자신은 냉혹한 살인자였지만, 현재의 자신은 죄책감과 후회 속에 남겨진 무력한 노인이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는지, 죽이지 않았는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타인의 행동조차 오해하거나 왜곡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심리 묘사는 기억이 인간 존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특히 병수의 딸 은희와의 관계는 이러한 신뢰성 문제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병수는 은희가 자신을 감시하는 것 같고, 자신이 의심하는 남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병수의 시점에서만 서술된다. 독자는 병수의 심리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그의 판단이 맞는지 아닌지를 계속해서 의심하게 된다. 이처럼 독자에게 이야기의 진실을 단정하지 않고, 불확실성을 유지시키는 방식은 치매라는 질병이 주는 인식의 불안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서사 전략이다.

김영하는 이러한 서술 방식을 통해, ‘기억’이라는 주제를 단순히 인간적인 공감의 차원이 아니라, 문학의 구조와 연계된 복합적인 텍스트 전략으로 전개한다. 기억의 불확실성은 곧 진실의 불확실성이 되고, 이는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다시 말해, 병수의 치매는 플롯 전개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문학의 서술 구조 자체를 재구성하는 메타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현대 문학이 주목하는 인식론적 문제와도 맞닿아 있으며, 살인자의 기억법을 단순한 범죄소설이 아닌 철학적 소설로 격상시킨다.

선악의 구분 진실을 해석하는 주체

살인자의 기억법이 독자에게 가장 강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단순히 플롯의 반전이나 스릴감이 아니라, 윤리적 긴장과 질문이다. 주인공이 과거에 사람을 죽였고, 지금은 또 다른 살인을 막으려 하지만, 그 판단 기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는 정의로운가? 아니면 여전히 죄인인가? 이 질문은 독자 개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던져진다.

병수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어떤 살인은 ‘필요’했다고 믿는다. 그는 법으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사회는 그의 죄를 모른 채 그를 방치해두었다. 이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법으로 처벌받지 않은 자가 진정한 살인자가 아니라면, 정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병수는 스스로를 심판하고, 기억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스스로의 죄를 직면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면서도, 그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작품은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악인은 명확히 존재하지만, 그를 처벌하거나 고발하는 과정조차 완벽하지 않다. 병수는 자신이 과거에는 살인이 가능했던 냉혹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지만, 지금은 정의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정의가 과연 객관적인 것인지, 혹은 노쇠와 죄책감에 기반한 자기 위안인지는 독자가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설정은 문학이 독자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독자는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윤리적 판단자가 되며, 이야기의 진실을 해석하는 주체로 작용한다. 병수의 고백과 혼란, 기억의 왜곡,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의 감정은 모두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작품이 끝난 이후에도 독자의 마음속에 남는 불편함과 고민은, 김영하 문학이 지닌 잔혹하면서도 사유적인 힘의 증거다.

또한 이 소설은 한국 사회에서 노인, 치매, 가족, 여성, 폭력 등의 복합적인 담론을 교차시킨다. 병수와 은희의 관계는 가족 내 감정적 거리와 돌봄의 문제를 드러내며, 치매라는 질병은 단지 병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의 소외와 무관심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살인자의 기억법은 개인의 기억과 죄, 윤리만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 인간의 위치까지 통합적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스릴러라는 장르적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본질은 인간의 기억, 윤리, 그리고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문학적 탐구다. 김영하는 치매라는 서술 장치를 통해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독자로 하여금 끝없이 판단하고 해석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단순한 반전이 아닌, 독자의 윤리적 위치를 시험하는 문제작이며, 한국 현대문학의 뛰어난 성취 중 하나로 평가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