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쉰의 아Q정전은 단순한 소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중국 현대문학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동아시아 사회가 겪어온 계몽과 부조리, 민중 의식의 무기력함, 그리고 사회 구조적 모순을 통렬하게 파헤친 텍스트다. 주인공 아Q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너무도 현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중국인의 초상’으로 널리 회자된다. 본문에서는 이 작품을 구성하는 세 가지 중심 축—정신승리법이라는 자기기만의 기제, 청말혁명기의 사회 배경, 루쉰 특유의 풍자적 문학 전략—을 통해 아Q의 인물이 어떻게 당대 현실을 반영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지니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한다.
소설 아Q정전 속 정신승리법
아Q는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의 성도, 이름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그를 그저 ‘아Q’라고 부른다. 이는 그가 사회적 존재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비인격적 존재’임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기제를 갖고 있다. 바로 ‘정신승리법’이다. 이 개념은 그가 사회적, 육체적으로 패배를 겪을 때마다 “나는 마음으로는 졌지 않았다” 혹은 “나는 원래 저들보다 나은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이다.
이 정신승리법은 처음엔 우스꽝스럽고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고, 그의 삶이 점점 퇴보하면서 이 웃음은 점차 고통으로 바뀐다. 루쉰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웃음을 이용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진정 아Q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날카로운 자기반성이 필요하게 된다.
아Q의 이런 태도는 그를 개인적으로 무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해악을 끼친다. 그는 어떤 부당함에도 저항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괴롭힘으로써 ‘복수’를 수행한다. 이는 구조적 폭력의 내면화와 재생산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고스란히 하층민에게 되돌리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Q는 단지 한 명의 우스운 인물이 아니라, 억압적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소극적 공모자’로서 기능한다.
루쉰은 아Q를 비판하면서도, 그를 통해 ‘무지한 민중’에 대한 단죄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왜 민중이 이런 식의 삶에 익숙해졌는지, 어떤 사회적 장치가 이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정신승리법은 그 사회의 비참함이 얼마나 만연했는지를 반증한다. 근대화는 엘리트 지식인의 전유물이었고, 대중은 변화의 담론에서 소외되었다. 아Q는 그 소외의 결정체다.
결국 정신승리법은 개인의 방어기제이면서, 한 사회의 실패한 자화상이다. 루쉰은 이를 통해 정치적 저항 이전에 필요한 것은 ‘의식의 각성’임을 설파한다. 그는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기 인식’이라고 말한다. 아Q는 그런 자기 인식의 실패가 만들어낸 존재이며, 독자들은 그를 통해 자신이 가진 정신적 태도를 점검하게 된다.
혁명의 결과 냉소적인 묘사
아Q정전은 1911년 신해혁명 직전과 직후의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중국은 봉건왕조가 무너지고, 공화주의 체제가 수립되는 전환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체제의 변화는 현실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지 못했다. 왕조가 공화국으로 바뀌었지만, 민중은 여전히 착취당했고, 정치 권력은 군벌과 지식인, 관료들의 손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Q가 혁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면 루쉰의 비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Q는 혁명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혁명당원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 그는 혁명을 개인적 이득의 도구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아Q는 혁명의 본질인 정치적 의식이나 집단적 연대에는 전혀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도 뭔가 대단한 일의 일부가 되었다'는 허상에 기뻐할 뿐이다.
이 장면은 중국에서의 정치적 담론이 얼마나 민중과 괴리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신해혁명은 이념적으로 공화주의, 국민 개혁, 사회 변화를 주장했지만, 민중에게는 그저 또 다른 ‘위정자 교체’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아Q는 그런 현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루쉰은 이 장면을 통해 “혁명이 이름뿐인 혁명이 될 때, 그것은 오히려 민중을 더욱 무력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또한, 이 작품에는 실제 혁명의 결과가 아Q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냉소적인 묘사도 있다. 그는 결국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처형당하게 되는데, 그 죄가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그는 고통스러운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내가 죽는 건 이상하다"고 말한다. 이는 민중의 죽음이 체제 변화와 무관하게, 여전히 부조리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루쉰은 여기서 체제 전환기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주체가 되지 못한 현실을 통렬히 풍자한다. 그는 ‘근대화’와 ‘문명’이 단지 상층부의 기득권 변화로만 진행되는 한, 민중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아Q는 이런 구조적 모순에 무지했기에, 스스로 혁명에 복종했으며, 결국엔 가장 먼저 제거되는 존재가 된다. 이 점은 아Q정전이 단지 고전적 풍자 소설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대한 본질적 비판을 담고 있는 현대적 작품임을 증명한다.
문학의 사회적 책임 지식인으로서의 책무
루쉰은 단지 문학 작가가 아니라, 계몽주의자였다. 그는 문학을 통해 중국 사회에 ‘정신적 각성’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아Q정전은 바로 그런 목적에서 태어난 작품이며, 당시의 문학 관습을 철저히 거부하고 새로운 형식을 제시했다. 루쉰은 전통적인 문어체가 아닌 백화체(구어체)를 사용했고, 아Q라는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문학의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소설의 풍자는 단지 유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풍자 뒤에는 깊은 슬픔과 분노가 숨어 있다. 아Q는 익살스럽고 멍청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의 존재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그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거울’이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중국 민중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단지 개인 탓이 아님을 함께 드러낸다. 이는 그가 가진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과 깊이 연결된다.
더불어 루쉰은 이 작품에서 문학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현실을 회피하는 낭만주의나 개인 감성에 치우친 감상적 글쓰기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에게 문학은 고통을 직면하게 만드는 수단이어야 했다. 아Q정전의 문장들은 단순하지만, 매우 직설적이며, 독자의 양심을 정면으로 겨눈다. 그는 “희망이란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마치 길처럼, 사람이 걷다 보면 생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문학도 마찬가지로 현실을 걷고, 사람들의 의식을 자극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의미다.
또한 루쉰은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단지 지적 활동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사회와 민중의 삶에 발을 담갔다. 아Q정전은 그런 그의 문학관과 인생관이 가장 잘 구현된 작품이다. 그는 웃기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고, 풍자를 통해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려 했다. 이러한 자세는 이후 중국의 많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문학을 통한 계몽이라는 흐름을 본격화시켰다.
아Q정전은 단순히 “정신승리법”이라는 유행어를 만든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중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민중의 무력한 삶, 지식인의 역할, 문학의 기능 등 다층적인 문제를 치밀하게 다룬 작품이다. 루쉰은 아Q라는 인물을 통해 “민중은 왜 스스로를 해방하지 못하는가?”, “혁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문학은 현실을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아Q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인물이다. 체제에 무관심하고, 저항보다는 순응을 택하며, 자신의 열패를 희화화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루쉰의 경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Q정전을 통해 “스스로 깨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단지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비판이며, 독자에게 ‘너는 아Q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학적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