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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리뷰 (기억삭제 설정, 반복되는 사랑, 원작 결말)

by anmoklove 2026. 2. 21.

이터널 선샤인

21세기를 대표하는 멜로 영화 중 하나인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의 아픔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SF적 설정과 결합시킨 독특한 작품입니다. BBC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멜로 영화로 꼽혔지만, 동시에 사람마다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핵심 설정인 기억 삭제 시스템부터 반복되는 사랑의 구조, 그리고 초기 각본에 담겼던 원작 결말까지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기억삭제 설정: 사랑의 흔적을 지우는 기술적 장치

영화 속 주인공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헤어진 후 서로에 대한 기억을 완벽하게 지우기로 결심합니다. 이들이 찾아간 곳은 기억을 삭제해주는 기술을 보유한 병원이었습니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방과 관련된 모든 추억들이었습니다. 사진, 편지, 선물 등 물리적 증거들을 모두 제출하면, 이를 바탕으로 머릿속에 기억의 지도를 그리고 이를 되짚어 가며 삭제해 나가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클레멘타인이 먼저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웠고,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조엘 역시 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발렌타인 선물을 들고 그녀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그를 모른척하며 새로운 남자 패트릭과 애정 표현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적지 않은 충격과 슬픔을 느낀 끝에 같은 선택을 내립니다.
기억 삭제 작업은 집에서 진행됩니다. 하워드 박사와 그의 팀인 스탠과 패트릭이 조엘의 집으로 찾아와 작업을 시작합니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도려내는 방식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조엘의 무의식 속에서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실 속 패트릭의 목소리가 기억 속으로 들어오고, 조엘은 점차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패트릭이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붙였던 애칭 '오렌지'를 그대로 사용하는 장면에서 조엘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기억 삭제 설정은 단순한 SF적 장치를 넘어서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아픈 기억을 지우는 것이 진정한 치유일까요?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진짜로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이러한 철학적 질문을 기술적 설정을 통해 구체화시킵니다. 관객들은 조엘이 무의식 속에서 클레멘타인과 함께 도망치는 장면을 보며, 기억은 단순히 삭제할 수 있는 데이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기억 속에서 행복을 되찾은 조엘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하고, 사라져가는 기억 속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도망치려 합니다.

반복되는 사랑: 운명적 만남의 끝없는 순환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구성 요소는 두 번째 첫 만남과 그 직후의 이야기를 첫 번째와 마지막 시퀀스에 배치시킨 독특한 구조입니다. 기억이 모두 지워진 다음날 아침, 출근하던 조엘은 무언가에 홀린 듯 몬테인 기차에 몸을 싣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클레멘타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마치 처음 만났던 몬테인으로 와달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 무의식 속에 각인된 것처럼 말입니다.
영화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랑을 담아냅니다. 운명적이고 극적인 만남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때로는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 속 관계의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냅니다.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렸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시간이 지나며 그저그런 생기없는 커플이 되어갑니다. 서로의 가장 좋았던 면이 가장 짜증나는 면으로 바뀌는 순간, 그 짜증이 선을 넘는 언행으로 표출되는 순간, 그들의 인연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영화의 초기 각본에는 더욱 의미심장한 결말이 존재했습니다. 나이가 많이 든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등장시켜, 그들이 여러 차례 사랑하고 헤어지고 기억을 지우고 또 다시 운명처럼 만나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원래 결말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사랑의 순환성과 운명의 불가피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설정입니다.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같은 사람에게 끌리고, 같은 과정을 거쳐 사랑하고, 또 같은 이유로 헤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운명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를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현재의 극장 개봉 버전은 이러한 반복의 명시적 묘사를 편집해서 잘라냈습니다. 대신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을 선택했습니다. 메리가 환자들에게 되돌려 준 기억의 조각을 마주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과 상대방의 안 좋은 면들을 다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괜찮아"라며 다시 사랑을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사랑의 선택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단점을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원작 결말: 편집된 진실과 영화적 완성도

BBC에서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멜로 영화로 뽑히긴 했으나,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장 큰 논쟁거리는 영화 마지막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 기억을 삭제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상대방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을 다시 듣고도 연인 관계를 이어간다는 장면입니다. 물론 이러한 전개도 가능한 스토리이긴 하나, 관객에 따라서는 너무 스토리를 비튼 느낌도 있고 이를 위해 영화 마지막 부분이 다소 성급하게 정리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서로의 기억이 삭제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 거기에 더해서 상대방에게 느꼈던 안 좋은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듣고 나서의 감정적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이 너무 간단하게 극복돼 버린다는 비판이 존재합니다. 실제로 테이프를 통해 "당신은 이렇고 저렇고..."라는 부정적 평가들을 직접 듣는 장면은 관계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몇 초간의 침묵과 "괜찮아"라는 한마디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원작 결말을 알고 나면 이러한 비판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초기 각본에서 나이 든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반복적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현재 버전의 "괜찮아"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필연적 선택임을 암시합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운명이라면, 어차피 같은 과정을 반복할 것이라면, 그 사실을 알고도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더 성숙한 사랑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원래 버전이 더욱 편안한 마무리일 수 있지만, 확실히 지금 버전처럼 영혼이나 감동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영화 속 하워드 박사와 메리의 서브플롯도 이러한 주제를 강화합니다. 그들 역시 불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들키게 되자 메리의 부탁으로 기억을 지웠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자신의 자료를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고, 결국 모든 환자들의 자료를 들고 병원을 떠납니다. 이는 기억 삭제가 결코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며,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 볼 때보다 두 번째 세 번째 볼 때 여운이 더 커지며, 특히 이별을 여러 번 겪은 후 나이가 들어 다시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는 관객 평가가 많은 공감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의 불완전함과 반복성,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인간의 용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원작 결말은 편집되어 관객의 상상에 맡겨졌지만, 그 여운은 영화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서로의 단점을 알면서도 "속는 셈 치고 다시 사랑을 믿어볼까"라는 태도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사랑의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성급하게 정리된 듯 보이는 결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youtu.be/VIJRLRJRwo4?si=_r_xFByYoEHp8R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