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소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정점 중 하나로, 고대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화자로 내세워 그의 마지막 순간에 삶과 역사, 인간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을 펼치는 작품이다. 단순한 역사소설을 넘어 이 작품은 존재에 대한 탐구, 권력과 책임의 무게, 죽음과 시간의 본질에 대한 고백으로서 읽히며, 역사와 문학, 철학의 경계를 허무는 텍스트로 평가받는다. 하드리아누스의 목소리는 단순한 기록이나 회고가 아니라, 생을 다한 인간이 남긴 마지막 사유의 흔적으로서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본 글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회상록을 ‘로마 제국과 황제의 역사’, ‘자아에 대한 철학적 성찰’, ‘권력과 인간 본질’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속 로마 : 황제가 말하는 역사
하드리아누스 회상록의 출발점은 고대 로마의 역사다. 하지만 유르스나르는 단순히 로마의 정치사나 사건을 나열하지 않는다. 그는 하드리아누스를 통해 제국의 흥망과 질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인간 내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드리아누스는 스스로가 제국의 수장이자, 동시에 그 체제의 희생자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제국 통치를 회고하면서, 단지 업적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허약한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를 되돌아본다.
작품 속에서 하드리아누스는 전쟁을 통한 확장보다는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며, 경계를 관리하고 체계를 유지하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이상으로 삼는다. 그는 정복보다 유지가 더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으며, 로마의 법과 질서가 어떻게 허물어지고, 왜곡되고, 때로는 무기력하게 작동하는지를 고통스럽게 인식한다. 그의 회상은 단순히 한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모든 제국이 겪는 본질적 모순과 쇠락의 기제를 담고 있다.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를 통해 인간이 만든 거대한 체제가 결국 인간적 한계 위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정적들과의 갈등, 권력의 분배 문제, 후계자 선택 등 정치적 이슈에 대해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마주했던 복잡한 정치 현실을 숨기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한 인간이 제국을 통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정치적 회상은 단지 과거의 문제로만 읽히지 않는다. 현대 사회 역시 권력의 구조, 정치적 윤리, 지도자의 책임이라는 면에서 하드리아누스가 던지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아 성찰: 존재와 시간의 기록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철학적 깊이에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며, 시간과 존재, 인간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젊은 시절의 열정, 중년의 야망, 노년의 체념을 고백하며, 생의 흐름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의 목소리를 빌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하드리아누스는 과거의 사건들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 실수와 깨달음을 되짚으며,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내면적 독백은 존재론적 사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권력자이지만, 동시에 외로운 인간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생명체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영원성’이라는 로마 제국의 이상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데 이르게 한다.
또한 하드리아누스는 기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접근한다. 그는 기억이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는 방식이며, 삶을 이해하는 틀이라고 말한다. 기억을 통해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정의하고, 또 누가 되어가고 있었는지를 성찰한다. 유르스나르의 문장은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언어로 담아내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 역시 하드리아누스처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은 과거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질문이며, 미래를 향한 유산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 태도는 서구 철학 전통의 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들과도 연결되며, 고전과 현대, 철학과 문학이 한데 어우러진 인문학적 총체로 기능한다.
권력 : 죽음을 앞둔 고백
하드리아누스 회상록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권력을 쥐었던 한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돌아보는 고백이다. 그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며, 역사의 중심에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병든 노인이고, 한 생을 마감하려는 개인이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황제의 권위보다 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을 마주하게 된다. 유르스나르는 이 소설을 통해 권력의 정점에 선 인간조차 죽음과 상실, 후회와 슬픔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드리아누스는 정치적 판단의 결과로 죽은 이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고, 사랑했던 청년 안티노우스를 잃은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그는 또한 후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고민하며, 자신이 남긴 것이 과연 미래에도 유의미할 것인지 불안해한다. 이러한 내면 고백은 황제의 고뇌를 넘어,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서 마주하는 근원적 질문과 닿아 있다.
유르스나르는 권력과 인간의 본질을 대립하는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권력이라는 극단적인 조건 속에서도 인간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탐구한다. 하드리아누스는 스스로의 결정을 반성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자신이 결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제국의 황제였지만, 동시에 수많은 갈등과 혼란 속에서 삶을 이끌어야 했던 한 인간이었다.
이 작품의 문학적 위대함은, 독자가 하드리아누스를 ‘역사 속 인물’로 보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거울’로 보게 만든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가 남긴 문장을 읽으며, 우리 자신의 실패와 성취, 사랑과 상실, 기억과 망각을 돌아보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결국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아름다움을 고백하는 화자로, 그의 이야기는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역사소설을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아낸 문학의 거장다운 작품이다. 로마 제국이라는 무대를 통해 정치와 권력의 역동을 펼쳐 보이며, 동시에 한 인간의 내면을 치열하게 파헤치는 이 소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질문을 던진다. 유르스나르의 치밀한 문장과 사유는 독자로 하여금 단지 한 황제의 삶을 읽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결국, 이 회상록은 죽음을 앞둔 인간이 남긴 가장 진솔하고 철학적인 ‘살아 있는 목소리’이며, 문학이 줄 수 있는 깊은 위안과 통찰을 동시에 제공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