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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속 자아, 동양과 서양, 정체성

by anmoklove 2025. 12. 7.

하얀 성 표지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은 터키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철학적 소설이자, 정체성과 자아, 문명 간 충돌, 그리고 역사적 상상력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입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이탈리아에서 포로로 잡혀온 한 서양인의 회고록 형식을 취하면서, 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나와 닮은 터키인' 호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됩니다. 외면상 이 작품은 포로와 주인의 관계, 과학과 신앙, 서양과 동양의 비교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자아의 모호함, 정체성의 이중성, 그리고 자기 동일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글에서는 『하얀 성』의 문학적·철학적 깊이를 ‘자아의 분열’, ‘동서 문명의 교차’, ‘정체성의 해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분석합니다.

하얀 성 속 자아 : 나와 너의 경계

『하얀 성』의 가장 핵심적인 서사 구조는 ‘나’와 ‘호자’의 관계입니다. 소설의 화자는 이탈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온 젊은 학자이며, 그는 주인 호자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위치로 존재하던 두 인물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닮아가고, 서로의 지식, 습관, 언어, 태도를 공유하게 됩니다. 특히 이 둘이 서로를 끊임없이 모방하고, 배우며, 경쟁하고, 때로는 혐오하고, 또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 자아의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 인간의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유동적인 정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주인공은 호자와 관계를 맺으며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서부터가 너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닮음’의 테마는 문학적으로는 도플갱어(doppelgänger)의 전통을 따르며, 철학적으로는 자아와 타자의 동일화라는 주제를 탐구합니다.

결국 두 인물은 서로의 존재를 삼켜버릴 듯한 동일화 과정을 거치며, 그 경계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이는 곧 ‘나’라는 존재가 타자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며, 자아란 언제든지 외부로부터 해체되고 다시 구성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이야기의 말미에 자신이 진짜 이탈리아인인지, 혹은 호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며, 이는 자아의 해체와 정체성의 붕괴를 상징합니다. 파묵은 이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 : 오스만 제국의 은유

『하얀 성』의 배경은 17세기 오스만 제국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적 배경은 단순한 역사적 세팅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만나는 접점이자, 그 충돌과 상호작용을 그려내는 상징적 장치로 사용됩니다. 파묵은 이 작품에서 서양의 과학, 합리주의, 개인주의와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 세계관, 신앙, 운명론 사이의 긴장과 교차를 정교하게 직조합니다. 주인공은 이탈리아에서 온 서양인이며, 호자는 전통적인 오스만의 세계관을 대표합니다.

두 인물은 서로의 지식을 흡수하며, 각각의 문명과 세계관에 영향을 받습니다. 호자는 서양의 천문학과 과학 기술에 관심을 가지며, 주인공은 오스만 제국의 사회 구조와 언어, 종교를 이해해갑니다. 이 과정에서 파묵은 단순한 문명 간의 대립을 넘어서, 그 사이의 모호한 경계와 융합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즉, 이 작품은 ‘동양 vs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아닌, 서로에게 스며들고 변형되는 과정에 주목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스만 제국이 지닌 ‘타자성’이 작가에게 고유한 시선으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파묵은 터키 문학 전통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면서, 서양 독자에게도 낯설고 흥미로운 오스만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재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단순히 ‘이국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존재하는 권력, 욕망, 실패, 역사적 기억들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사의 비극을 그려냅니다. 결국 『하얀 성』은 문명 간의 우열이 아닌, 상호작용과 혼종성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습니다.

정체성 :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하얀 성』의 결말은 독자에게 충격을 안겨줍니다. ‘나’였던 주인공은 자신이 호자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그가 남긴 회고록조차도 진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소설은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확신을 무너뜨리고,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강조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기억은 진짜인가’, ‘기억은 개인의 것인가 타자의 것인가’라는 질문들이 작품 전체를 지배합니다.

이러한 서사 전략은 현대문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의 전형이며,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텍스트 안에서 해체시키는 탈근대적 실험입니다. 파묵은 이 소설을 통해 자아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고 서사화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이때 기억은 자아를 유지하는 핵심 수단이지만, 그 기억조차 타인과의 교차 속에서 변형되고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서술하면서 끊임없이 호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나중에는 호자의 삶을 살아가는 듯한 묘사를 보입니다. 이처럼 주체가 타자의 삶과 뒤섞이고, 기억과 현실, 허구와 진실이 얽히면서 독자는 결국 자아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는 단지 개인적 정체성의 혼란이 아니라, 역사적 주체로서의 인간, 특히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강요받거나 잃어버린 존재들을 상징하는 장치로도 해석됩니다.

파묵은 터키의 복합적인 역사—동서양의 교차점에서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정립해야 했던 국가의 경험—을 한 개인의 이야기 속에 함축적으로 담아냅니다. 『하얀 성』의 화자는 결국 누구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인가? 누구의 기억이었고, 누구의 삶이었는가? 이 질문은 독자에게 깊은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며, 소설을 단순한 역사소설이나 서사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승격시킵니다.

『하얀 성』은 자아와 타자, 동양과 서양, 과학과 신앙,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긴밀하게 엮어낸 작품입니다. 파묵은 이 소설을 통해 인간 존재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이고, 자아의 실체가 얼마나 허약하며, 문명 간의 만남이 어떻게 새로운 시선과 정체성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지를 문학적으로 실험합니다. 이 작품은 철저히 ‘나’의 이야기이면서도, 결국 ‘너’의 이야기로 귀결되며, 그 경계를 흐리게 만듭니다. 오르한 파묵은 『하얀 성』을 통해 독자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로 살고 있는가?